피터팬의 죽음에 대한 애도.

애도의 중요성

 오늘날에는 상례(喪禮)가 사라져 가는 경향이 있다. 가족 중의 누가 세상을 떠난 경우에도 사람들은 장례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둘러 평소의 활동을 다시 시작한다. 소중한 존재가 사라지는 일이 갈수록 덜 심각한 사건이 되어간다. 검은색은 전형적인 상복의 생깔이라는 특권을 상실했다. 디자이너들은 검은색이 사람을 날씬해 보이게 하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는 이유로 개나 소나 시도 때도 없이 검은색 옷을 입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떤 시기의 종말이나 어떤 존재의 소명을 애도하는 것은 사람들의 심리적인 안정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른바 원시 사회라 불리는 사회에서만은 여전히 애도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예컨대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온 마을 사람들이 활동을 중단하고 애도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장례식을 두 차례에 걸쳐 치른다. 첫번째 장례식 때에는 모두가 슬퍼하며 묵상하는 가운데 시신을 땅에 묻는다. 그런 다음, 시간이 좀 지난 뒤에 두 번째 장례식을 치르면서 대대적인 축제를 벌인다.
 비단 사람이 죽었을 때뿐만 아니라, 어떤 직장이나 삶의 터전을 떠날 때처럼 <종결의 사건>이 있는 경우에도 애도는 필요하다. 이런 경우에 애도는 일종의 형식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아서 사람들이 대개는 이것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지만, 이것은 결코 쓸데없는 짓이 아니다. 인생이라는 여정의 단계를 표시하는 일은 중요하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나름의 애도 의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기르고 있던 콧수염을 밀어 버리거나 머리 모양을 바꾸거나 복장의 유형을 바구는 것과 같은 가장 간단한 것에서부터, 걸판지게 잔치를 벌이거나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퍼마시거나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는 것과 같은 다소 격렬한 것에 이르기가지 아주 다양한 의식이 있을 수 있다.
 애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치 잡초의 뿌리를 제대로 뽑아 내지 않은 것처럼 사건의 후유증이 오래간다.
 어쩌면 학교에서도 애도의 중요성을 가르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중에 애도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몇 년씩 고통을 겪는 일이 생기지 않게 말이다.

애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서전』, 제4권

-천사들의 제국(베르나르 베르베르 作) 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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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이다.  늘 그랬듯, 심경의 변화가 있을 때에야 포스팅을 작성하게 된다. 포스팅이라해 봤자 결국 그저 그런 일기일 뿐이지만. 아! 일기이기 때문에 심경의 변화가 있을 때에만 작성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건가? 아니지. 일기라면 매일 써야 하잖아? 뭐 그런건 어찌되었건 상관없다. 다만 지금은 찰칵찰칵하는 노트북의 자판음이 상당히 듣기 좋을 뿐이다.

 난 오래전부터 피터팬을 동경해왔다. 모두가 어른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끝끝내 동심을 지킨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여겼고 그런 용기야 말로 참으로 멋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은 되고 싶지 않다는, 혹은 나만은 남과 같고 싶지 않다는 치기어린 욕심이랄까? 어쩌면 남들과 다른 발상을 소명처럼 여겨왔던 나이기에 남들처럼 주변의 상황에 타협하여 소위 '어른스러워 지는 것'을 스스로에 대한 죄악처럼 여겨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난 한가지 중요한 실수를 저질렀다. 동심을 지키는 것과 어리광 부리는 것을 같은 것으로 착각했다는 사실이다. 부끄럽지만 그 둘이 다르다는 걸 깨달은 건 최근의 일이다. 정말 부끄럽게도.
 사람이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일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첫번째는 하고 싶은 일이고 두번째는 해야 하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을 해야 한다. 말장난 처럼 들리는 이 문장이야 말로 인류가 지닌 업이다.
 비극적인 것은 아무리 해야만 하는 하는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결코 하고 싶은 일을 이룰 수 없다는 점이다. 수 많은 인간의 욕망이 서로 들끓듯 상충하는 이 세상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평생을 해야만 하는 일만 하다가 생을 마쳐 버린다. 설사 운이 좋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마주치는 것은 다음의 셋 중 하나이다. 첫째, 하고 싶었던 마음이 시들해져 버리거나 둘째, 해야 할 때를 놓쳐버렸거나 셋째, 더 하고 싶은 다른 일이 생겨버렸거나. 세번째 경우에 처해지는 사람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첫번째와 두번째의 경우에 처한 사람은 그 상황을 견딜수 없기 때문에 결국 새로운 욕망을 품게 되고 세번째 경우와 같아지고야 만다. 결국 인간은 "끊임없이 해야만 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이 역설적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이야 말로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다라는 말의 정체다.
 난 그 고통을 외면하고 싶었다. 내가 꿈꿔왔던 피터팬이란 그런 존재였다. 인간적인 고통에서 벗어나 마음껏,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사는 것. 마치 어린애처럼......
 하지만 해야 하는 일만 하면서 사는 것 만큼이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사는 인생 또한 의미가 없다. 아니, 그런 인생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좋든 싫든 세상은 법칙이 지배하고 있고 그 법칙 중에는 원인과 결과라는 것이 있다. 내가 한 행동이 원인이 되어 생긴 결과는 어떤 식으로든 내가 속한 코딱지 만한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산다는 것은 그 일로 인해 일어난 영향에 대해 스스로 완벽하게 책임을 질 수 있거나 - 책임을 진다는 것 자체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사실은 일단 차처해두자 - 기꺼이 책임을 대신 떠맡을 사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만에 하나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는 살아가는 동안 정말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나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 속에서 이 일 저 일을 탐닉하게 된다. 그 이유는 위에서 서술한 역설적인 굴레를 이루는 세가지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분명 그런 삶 또한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결과 따위는 고려하고 싶지 않았다. "일일이 결과 따위를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건 피터팬이 할 짓이 아냐! 피터팬은 그저 꿈꾸는 것만 생각하면 돼!" 라고 생각하면서. 아! 이 얼마나 부끄러운 어리광인가! 난 마치 기저귀를 갈아주기를 기다리는 어린애처럼 책임져 주지도 않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 맡긴 채 그저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에만 몰두하려 한 멍청이 바보 똥개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야 말로 어리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와서 깨달은 사실이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을 해야 하는 업이야 말로 행복이 아닐까 한다. 이루어도 괴롭고 이루지 못해도 괴롭다면 이루어 가려는 과정을 즐기는 수 밖에 길이 없지 않겠나?
 난 피터팬을 죽여 버렸다. 허나 내가 죽인 것은 어리광이라는 이름의 피터팬 뿐이다. 내게 필요없는 것은 어린애처럼 행동하는 것이지 어린애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동심으로서의 피터팬은 여전히 나에게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될 것이다.
 어쨌든 하나의 피터팬은 죽었고 난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의식을 치르려고 한다. 뭐가 좋을까? 머리는 이미 다른 이유 때문에 밀었고...... 담배를 끊어볼까? 흠. 그것도 꽤 괜찮은 애도가 될 것 같다.
 벌써 새벽 두시 반이 넘었다. 어떤 애도가 좋을지는 내일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오늘은 이만 자야겠다. 안 그러면 오늘 늦게 잔 결과가 회사에서 업무 집중력 저하라는 결과로 이어질테니......

by bigmann | 2009/09/01 02:40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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